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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 - 이정하 시 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 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감상 인간관계란 참 어렵다. 연인관계, 친구관계.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참 힘들다. 어릴 때는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또는 같은 반, 같은 학과라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온전히 신뢰하고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이 가능했다. 하.. 2022. 2. 6.
여인숙 - 잘랄루딘 루미 시 여인숙 - 잘랄루딘 루미 시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가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감상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매일 처한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여러 감정에 휩싸인다. 좋은 감정이 들 때도 있지만 .. 2021. 12. 14.
운동회 날 - 오성호 시 운동회 날 - 오성호 삶이란 게 가을 운동회 날처럼 늘 마음 설레게 하는 것이었으면 끝날 무렵이면 누구나 공책 한 권쯤은 챙길 수 있고 누구나 가족들 앞에 햇살처럼 뻐기고 설 수 있는 그런 날 어쩌다 넘어져서 꼴찌를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위로 받을 수 있고 공정한 출발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해도 좋은 달리기 시합처럼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 또한 그럴 수 있다면 진 편도 이긴 편도 모두 떳떳하게 푸른 하늘을 우러를 수 있는 그런 날들이라면 세상 모르는 아이들 박수소리 웃음소리 와글거리는 소리 새떼처럼 날아오르는 운동장 가에서 나는 오래 전 지워져 버린 내 소년의 슬픈 뒷모습을 찾아냈다 낡은 교실 모퉁이를 돌아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목이 꺾이고, 무릎이 꺾이고 끝내 이슬처럼 잦아진 내 소.. 2021. 12. 2.
새점을 치며 - 정호승 시 새점을 치며 - 정호승 눈 내리는 날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천원짜리 한 장 내밀고 새점을 치면서 어린 새에게 묻는다 나같은 인간은 맞아 죽어도 싸지만 어떻게 좀 안되겠느냐고 묻는다 새장에 갇힌 어린새에게 감상 인생은 측정이 불가능하다. 잘 살아 왔는지. 앞으로 잘 살 것인지. 현재가 힘들면 더욱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추운 겨울날 시장 바닥에 쪼그려 앉아 새에게 나의 인생을 물어본다. 보잘것 없이 살아온 나지만, 어떻게 좋은 일 좀 없겠는지. 묻는다. 작은 새장에 갇혀 날지도 못하는 어린 새에게. 묻는다. 2021.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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