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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시

by 담수쓰다 2021.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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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사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우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감상

나는 가난하다. 희미한 전등이 어둑한 좁다란 공간에서 다 낡은 무명 셔츠를 입고 앉아 따끈한 감주나 한잔 하고싶지만, 그마저도 어렵다. 방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빠진다. 가난했던 어머니, 파랗게 차가운 날에 무 배추를 씻으며 고생하셨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리고 차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군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조용하고 나지막한 집에서 살아간다.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그리고 그 어여쁜 그 사람. 내 가슴 사랑을 그렸고 그 사랑을 슬픔으로 가득 덧칠하는 사람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나보다. 초승달 바구지꽃 짝새와 당나귀 프랑시스 잼, 도연명,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듯이 나는 가난하고 부족하고 넘치는 사랑속에 슬픔을 채우도록 살도록 태어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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